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니콜로 파가니니 (문단 편집) == 평가 == [[프란츠 리스트|리스트]], [[브람스]], [[망고레]] 등 여러 유명한 작곡가들이 이 사람한테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가운데, 1832년 직접 파가니니의 연주를 라이브 공연으로 들어본 리스트는 너무나도 감격하여 그 자리에서 엉엉 울었다는 기록을 남겼으며 당시에 대하여 회상하며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수십여년이 지나도, 난 그 때의 여운을 잊지 못한다. 그 때, 나는 파가니니 연주를 듣고 눈물이 계속 나왔고 나는 죽어도 저 사람의 연주 실력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 누가 저 사람을 바이올린 연주로 앞선단 말이냐! 절대 그럴 수 없을 것이다라는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저 사람이 바이올린을 한다면 나는 피아노로써 파가니니가 되겠다! 아니면 미치광이가 되거나!''' 친구에게 보낸 리스트의 편지를 봐도 >2주 동안 내 마음과 손가락은 마치 길 잃은 영혼처럼 움직이고 있다네. >호메로스, 성서, 플라톤, 로크, 바이런, 위고, 라마르틴,샤토브리앙, 베토벤, 바흐, 훔멜, 모차르트, 베버가 모두 내 곁에 있다네. >나는 이들을 공부하고, 이들에 대해 명상하며, 분노로 그들을 집어삼킨다네. >뿐만 아니라 나는 하루에 4시간에서 5시간 정도를 손가락 연습[* 3도, 6도, 옥타브, 트레몰로, 연타, 카덴차 등]에 쓰고 있다네. >아! 만약 내가 미치지 않는다면 자네는 내 안에서 예술가를 찾을 수 있을 걸세! >그래, 예술가… 지금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지. 이처럼 수많은 거장들에게 영향을 줬을 뿐만 아니라 듣는 이를 거품 물고 쓰러지게 만들 만한, 기교로만 따지면 바이올린 분야에서 [[피에트로 로카텔리]] 이후 참 오랜만에 나타난 희대의 천재였다. 그의 연주는 기교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매력이 있어서 그를 좋지 않게 보던 사람들도 그의 연주를 듣고 난 후에는 그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고 한다. [[나폴레옹]]의 여동생인 엘리자 보나파르트는 그의 연주를 들을 때마다 기절했다고 한다. 심지어 관객들이 집단으로 [[히스테리]]를 일으킨 적도 있다고 하니 파가니니가 말년에 루머에 시달린 데에는 기교도 기교지만 이 점이 크게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오죽하면 밤에만 나타나야 할 [[유령]]들도 그가 연주만 하면 나와서 감탄하고 춤추거나 울었다는 이야기도 나왔고, 심지어 [[악마]]도 감격해 울거나 춤추었다는 이야기도 나올 정도였다. 쇼맨십이 있는 사람이었으며 [[바이올린]]을 G현만으로 연주하거나 활 대신 나뭇가지를 써서 연주하고 개, 고양이, 당나귀[* 이 소리를 흉내냈다가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당나귀 소리를 선보인 마을이 하필이면 주변 마을로부터 멍청한 당나귀라는 식의 [[지역드립]]을 수십 년간 들어온 곳인지라 파가니니를 [[린치]]하러 달려들었고 파가니니는 친구가 구해줄 때까지 높은 곳에서 반나절을 있어야 했다고.]등의 울음소리를 흉내내는 신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로 인해 연주에 기교뿐이고 진지한 마음이 없다는 식의 혹평을 받기도 했다. 도박에 손을 댔다가 빚을 져서 가지고 있던 바이올린을 처분했는데 한 사람이 파가니니 이외의 사람이 연주하지 않게 한다는 조건으로 [[과르네리]][* 소리가 매우 커서 '대포(Cannone)'라 불린다. 파가니니의 연주는 음색은 아름다웠지만 음량이 작다는 단점이 있었기 때문에 이 악기의 큰 음량은 파가니니에게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를 넘겼고, 파가니니의 '내 바이올린, 내 영혼을 이제부터 영원히 제노바에 기증하노라' 라는 유언에 따라 이탈리아 제노바 시청에서 보관 중이다. 하지만 악기는 써 주어야 소리가 유지되기 때문에 Mario Trabucco라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정기적으로 연주해주고 있으며 악기 제작자 등, 여러 관리 위원들이 관리해주고 있다. 또 5년 주기로[* 원래는 격년제로 열렸는데 2010년부터 5년 주기로 열리게 된 듯.] 10월 12일에 Premio Paganini라는 콩쿠르가 열리는데 이 콩쿠르 우승자에게 여러 부상, 또 녹음 기회와 함께 과르네리 캐논으로 연주를 할 수 있는 특권을 준다고 한다.[* 쇼팽 콩쿠르 같은 다른 콩쿠르가 흔히 그렇듯이, 순위에 적합한 참가자가 없다고 판단되면 그 순위는 그냥 비워버린다.] [youtube(uSBHsrPzf_s)]{{{-1 클래식 기타 전곡. 루이지 아타데모(Luigi Attademo) 연주.}}}[* 기타줄 제조사 사바레즈의 [[https://www.savarez.com/luigi-attademo|후원]]을 받으며 520B, 510MRP 제품을 사용한다. [[http://www.luigiattademo.it/|[[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width=20]]]] [[https://www.youtube.com/channel/UC7KAViVYwnuLAoFwsRqgTcg|[[파일:유튜브 아이콘.svg|width=20]]]] [[https://www.youtube.com/user/luigiattademo|[[파일:유튜브 아이콘.svg|width=20]]]] [[https://soundcloud.com/luigi-attademo|[[파일:사운드클라우드 아이콘.svg|width=20]]]] [[https://www.instagram.com/luigi.attademo/|[[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width=20]]]] [include(틀:트위터 로고, 링크=luigiattademo, 크기=20)] [[https://www.facebook.com/luigi.attademo|[[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width=20]]]] [[https://it.linkedin.com/in/luigi-attademo-4563165|[[파일:LinkedIn 아이콘.svg|width=20]]]] [[https://www.discogs.com/artist/2609319-Luigi-Attademo|[[파일:디스코그스 아이콘.svg|width=20]]]] [[|[[파일:위키백과 아이콘.svg|width=20]]]]]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몇 개의 악보도 남긴 '''[[클래식 기타]] 연주자'''이기도 하다. 기타를 공식적으로 남들 앞에서 연주한 적은 없었는데, 바이올린처럼 압도적인 연주를 보여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그의 기타곡은 크게 자신을 후원해 줬던 귀부인들을 위한 중간 정도의 난이도를 가진 곡과 프로들을 위한 난곡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기타 솔로나 바이올린 + 기타의 구성이 많다.]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음악도 적극적으로 기타용으로 편곡되고 있다. 공연을 자주 나가서 돈은 많이 벌었지만 무리한 나머지 건강이 악화되어서 죽을 날을 앞당기게 되었으며 거기에 젊어서 여자를 여럿 후리고 다닌 나머지 [[매독]]까지.. 말년에는 실력이 하도 사기적인 나머지 [[악마]]와 계약했다느니 하는 루머에 시달렸다.[* 웃긴 건 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은 [[프란츠 리스트]]마저도 루머를 퍼트리는 데 앞장섰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그도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젊은 시절 마구잡이로 살던 그가 중년에 소프라노 가수인 안토니아 비앙키와의 사이에서 얻은 아킬레였다. 파가니니는 늘그막에 아킬레를 데려와 극진히 아껴주었고 10대 중반인 아들에게 마음껏 살라면서 좀 더 너에게 잘 대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자주 말했다고 한다. 아들을 맡으면서 막장 인생을 좀 자제해서인지 제법 많은 재산을 남겨줬다. 사망 당시 아들이 어린 15살이니 아들을 맡아줄 사람이나 재산 상속 등 모든 준비도 철저하게 하여 아들은 파가니니가 죽고 나서도 큰 고생없이 잘 자랐고, 풍족하게 살 수 있었다. 파가니니가 외아들인 아킬레를 엄청 아껴준 이야기가 여럿 있는데, 살아 생전에 연주 여행에 아킬레를 꼭 데리고 다니면서 숙소로 호텔이 아닌 펜션에 머물렀다고 한다. 이는 어린 아들에게 집처럼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였다. 이래서 아들인 아킬레는 아버지를 무척 존경했고[* 사춘기인 10대쯤 되면 따로 살던 친부모가 데려와 잘해준다고 해도 거리감을 느끼거나 어릴 때 함께 있어주지 못한 것을 원망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은데, 파가니니가 아들에게 얼마나 사랑을 주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파가니니는 아킬레가 귀족이 될 수 있게끔 자신의 팬인 귀족들에게 부탁도 많이 했다. 심지어 아들을 귀족이 되게끔 해준다면 공연도 싸게 해주겠다고 고개를 숙이며 부탁했다. 결국 그의 노력으로 아킬레는 커서 귀족이 되어 [[남작]] 작위와 더불어 영지도 하사받았다. 이랬기에 아킬레는 존경하던 아버지가 생전 원하던 대로 죽으면 고향 성당 무덤에 묻어달라는 부탁을 평생 동안 지키려 했다. 자신이 못 하면 후손들에게 대를 이어 이 유언을 지키고자 했다고 한다. >[[제노바]] 태생의 천재 음악가[br]니콜로 파가니니[br]여기에 영면하다. >---- >[[묘비명]] 파가니니가 세상을 떠난 뒤 아들 아킬레는 아버지를 고향에 있는 성당 무덤에 묻으려 했으나 "악마와 계약하여 안 된다."고 거부당했으며 결국 고향에 묻힐 수 있게 되기까지 평생을 엄청 [[로비]]한 끝에 1886년, 무려 46년이 지나서야 그 뜻을 이루게 되었다. 아킬레는 이렇게 아버지를 드디어 원하던 대로 묻게 해주고 10년도 안 가 70세로 세상을 떠났으니... 인생 대부분을 아버지를 원하는 무덤에 묻게하고자 고생한 셈이다. 그런데 '''"[[노이즈 마케팅|파가니니가 직접 그런 '악마' 소문을 퍼트렸다]]."'''는 말도 있는데, "바이올린에 무슨 수작을 했기에 그런 소리가 나느냐?"라며 시시콜콜 캐묻는 주교에게 짜증이 나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대충 "내 바이올린엔 악마가 있고 내 활에도 악마가 있고 나도 악마니 알아서 하쇼!"라는 뉘양스의 말을 했다가 이런 참사가... 또 다른 설로는 당시에 기교가 만만찮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많아서 크게 두각을 나타낼 수 없자 [[파우스트(희곡)|파우스트]]를 보고 악마를 [[컨셉]]으로 잡았다는 말이 있다. 또는 이미 [[주제페 타르티니]]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 기교를 얻었다는 소문이 퍼졌던 것을 보면 그런 스토리를 자신의 마케팅에 적절히 활용했을 수도 있다. 이런 뒷얘기로나 실력이나 생전의 행적을 놓고 보면, 능력에 비해 인성과 행적이 엉망인 예술가들에게 흔히 붙는 '[[악마의 재능]]'이란 꼬리표가 매우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자신이 만들어낸 연주기법을 비밀로 붙였으며, 자신의 음악을 악보로 남기는 데 적극적이지 않았던 데다가 제자도 '시보리' 한 명뿐이라서 그의 기법 중 상당수가 소실되었다고 한다. 작곡의 경우, 연주 분야만큼의 수준을 인정받지는 못하는 편이다. 때문에 그가 남긴 작품은 음악적으로 연주 실력만큼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특유의 강렬한 비르투오소적인 인상으로 인해서 지금도 그의 음악은 작품성과 별도로 많이 연주되고 있다. 아울러 타 음악가들에 의해 바이올린 외의 악기로 편곡되거나, 이에 영감을 받은 작품들도 적지 않다. 리스트가 복잡한 기교를 요구하는 많은 곡을 남겨서 전공자들을 애먹였던 것처럼 그런 리스트의 비르투오소 성향의 원조격이라고 할 수 있는 파가니니도 당시 기준으로 파격적인 기교를 담아낸 음악들을 남겨서 전공자들에게 악명이 자자하다. 바이올린 혼자 반주와 연주를 동시에 소화하는 구성의 음악도 선보였으며 음의 이동도 어마어마하고, 손에 많은 부담을 주는 피치카토, 두 가지 음을 연주해야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3도부터 10도까지 다양한 화음이 곡에 등장한다. 심지어 네 가지 음을 동시에 연주해야하는 쿼드로플 스톱까지 등장하는데 이런 기교들을 그저 단순히 할 줄 아는 수준이 아니라 곡에 방해가 되지 않게 '잘' 소화해야한다는 것부터가 연주자의 실력이 엄청나게 높은 수준이어야 한다는 것을 요구받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서 당대의 바이올리니스트부터 현대의 전공자들에 이르기까지 고통을 받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